이 산이 아니네.

지도도 없이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그러면 당신은 가장 단기간에 오를 수 있는 길로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옆 산이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일단 다시 내려오거나 아니면 낮은 산을 계속 올라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이미 한계가 정해진 정상을 향해.

커리어가 이와 비슷하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어느덧, 아 이게 뭐지, 하게 된다.  그러나 쉽게 직장을 바꾸지는 못한다.  바꾸려면 일단 오르던 그 산을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특히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처부자식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리라.  생각만 해도 살 떨린다.

이것이 임팩트 함정 (The Impact Trap)이다.

이 산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계속 오르는 것은 도전이 아니라 관성이다. (Image Source – NPR Music)

사람들은 절대 직선이 곧게 뻗은 것처럼 성장할 수 없다.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고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기 싫다면 아예 처음부터 최고의 산을 골라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 시작할 때는 그 산과 주변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커리어를 볼 때는 길게 봐야 한다.  지금 당장 연봉을 얼마 더 받고 승진하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젠가 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 지금 당장 내려올 용기가 생기려면 길게 보고 있어야 한다.  1, 2년쯤은 괜찮다고 할 수 있어야, 여차하면 과감하게 내려올 수 있다.

 


 

Boz.com에 있는 The Impact Trap (임팩트 함정)이라는 글이다.  (직역은 아니니 원문을 읽어보시는 것도 권합니다.)  회사에서 누군가 커리어에 대한 상담을 요청할 때마다 많이 인용하는,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글이다—참고로 난 Boz의 팬이다.  커리어뿐 아니라 Product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요긴하게 쓰인다.

사실 결국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라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이야기를 산에 비유한 것에 불과하다.  비유의 소재로서의 산도 사실 식상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 글이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글의 마지막 부분 한 문장 때문이다.

우리를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여태 배운 것들이 아니라 배울 수 있는 능력 자체이다.

그래서 조금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내 커리어와 인생에 대해 더 길게 보고 언제든 두려움 없이 내려올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새해 목표 말고 5년 목표

언젠가 회사의 한 친구가 새해 목표를 정할 때 리스트를 적는 대신 테마만 정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다이어트 하기, 독서 몇 권 하기 이런 식의 계획이 아니라 “자아”라고 테마를 정하는 것이다.  아이와 놀아주기, 자기 전에 책 읽어 주기, 이렇게 하는 대신 “가족.”  이렇게 한 마디로 테마를 정하는 것이다—뭔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그 친구의 지난 삼 년간의 테마는 Joy, Do, Center였다.

이를 조금 응용해 아예 1년이 아니라 5년 단위로 테마를 잡는다.  예를 들어 30 – 35세 까지는 사랑, 36 – 40세 까지는 돈, 뭐 그런 식으로 잡을 수 있다.  그렇게 테마를 잡으면 2년 사귄 연인으로부터 갑자기 차인다거나, 지금 당장 돈이 크게 모이지 않는다 해도 더 큰 호흡으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 같은 경우 40 – 45세의 테마가 ‘배움’이다.  언젠가 자세히 쓰고 싶은 얘기지만, 40대에 접어들면서 두 번째의 20대를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때 못했던 것을 40대에 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메꾸고 싶은 후회의 첫 번째가 나는 바로 ‘배움’이다.  좀 더 공부했을 걸, 좀 더 시도해봤을 걸, 하는 후회들이 있다.  그래서 좀 더 시도해보고 배우는 것이 목표인데, 아마 마음처럼 잘 안되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5년이라면, ‘배움’을 위해서 언제든 한 발 내려설 용기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도 그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이미 엉망이지 않은가!  아무리 써도 블로그에는 아무도 안 오고 브런치 트래픽도 두 자릿수에 간신히 걸려있다.)

숨겨왔던 나아~의 모습을 찾아

내 삶의 관성을 감시하고 깨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의 리듬을 의도적으로라도 흩트릴 필요가 있다.  엔지니어링이 일이라면 의도적으로라도 노래 수업을 듣거나, 디자인이 일이라면 의도적으로 암벽등반 같은 아웃도어에 빠져보는 것이다.  우뇌 및 좌뇌를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더욱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과 귀를 열어놓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나 같은 경우 지난 연말부터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20대 중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손을 놓은 지 거의 15년 만이다.  빡빡한 회사 생활에 소설은 감정 사치처럼 느껴졌고, 엄청난 성공의 비밀을 담고 있는 것 같던 자기 계발서에 비하면 시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소설이 좋아졌다.  여전한 격무 속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정해 놓고 고양이가 인간과 힘을 합쳐 쥐를 무찌르는 이야기 등에 빠져들다 보면 머리와 가슴이 상쾌해진다.  좌뇌가 우뇌에게 자 이제 네 차례야 나 좀 쉴게, 하며 바통을 던져주면 우뇌가 얼씨구나 하고 신나게 달려가는 거다.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창의성에 그리고 그 절제되면서도 무궁무진한 표현력에 감탄하다 보면, 조금 더 풍만한 삶을 살게 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이 산이 틀린 산일까봐 불안하거나 하는 마음이 달아난다.  이 산이 아니라면 훌쩍 옮겨가면 되지, 하고 가벼운 마음이 된다.  마치 고양이가 지붕 사이를 넘나들듯이.

나만의 리듬과 관성을 자꾸 깨야 새로운 나의 모습과 세상을 받아들일 용기가 생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를 읽으면서 줄곧 상상하던 모습이다.
(Image Source – Google)

 


 

2016년 말, 회사 내 정치 싸움에 패하면서 팀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내 위로 왔다.  승승장구하던 두더지가 뿅망치에 얻어맞으면 그런 느낌이었으리라.  그리고 약 1년에 걸쳐 그 새로운 보스는 나의 역할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 나갔다.  만약 삼국 시대였다면 가지고 있던 ‘성과 군사’를 결국 빼앗기고 외톨이 신세가 된 것이다.  (언젠가 ‘실리콘 밸리 삼국지’라는 주제로 쓰고 싶은 글이다.)

그래도 한 ‘성’이 건재했고 아직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는 열려 있었다.  당시 페이스북이 겪기 시작한 어려움과 관련이 많은 팀이라 할 일도 많았고, 마크 저커버그가 공식적으로 이 팀을 위해 백지수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다 내려놓고 팀을 나왔다.  (물론 후임을 찾고 인수인계하는 시간은 꽤 걸렸다.)

그 결정을 위해 약 2주 간 회사에 휴가를 냈고, 마침 방문해 계시던 부모님과 함께 나파 밸리로 여행을 떠나 일과 완전히 단절된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앓던 가면 증후군의 정체를 인지하게 됐고, 그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 어이없지만, 자존감이었다.  그렇게 40명 남짓에서 시작해 4년 간 1,000명 이상의 조직으로 성장한 팀을 뒤로하고, 20명짜리의 작은 팀에 IC (Individual Contributor—팀원이 있는 매니저가 아니라 개인)로 옮겨 왔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내가 내린 결정 중 최고의 결정 중에 하나였다.  좀 더 장기적인 포부—비영리단체 및 사회적 기업 시장 구조의 변화—에 근접한 팀에서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가면 증후군은 사라졌고, 월요일 출근길이 가벼워졌다.

이 역시 어떤 산이 될지는 모른다.  겨우 일 년 남짓 했을 뿐이다.  다만 짧게나마 직접 겪어보니, 이 산이 아니다 싶으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려와도 괜찮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시 배울 수 있다는 믿음.  언제든 내려와 다시 시작하는 편이 망설이는 것보다는 낫다는 믿음.

이 산이 아니라고 깨닫는 순간, 계속 오르는 것은 도전이 아니라 관성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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