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니 시다바리다 (2)


감정 조절에 실패했던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나는 이베이에서 굉장히 낮은 레벨의 PM으로 시작했다.  당시 약 10년 정도의 경력을 가지고 대학 졸업 2년 차 정도로 입사했다.  (이건 물론 입사 후 시간이 좀 지난 뒤 안 사실이다.  상대방을 최우선으로 배려하는 나의 인도주의적인 협상 철학은 무슨.  그냥 나의 어이없고 한심한 협상 능력의 결과다.  이베이 입사 과정에 대해서는 언젠가 자세히.)

나의 주 업무는 하늘 같으신 BU (Business Unit)님들이 원하시는 프로덕트를 엔지니어들이 잘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조율자에 더 가까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BU와 엔지니어 사이를 잇는 다리와 같았다.  BU가 전략에 바탕을 둔 아이디어를 내면, 엔지니어와 함께 붙어서 그 프로덕트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엔지니어 측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BU에게 쪼르르 달려가 프로덕트의 기능을 조정해 주십쇼,하고 굽신거리기도 하고 그러는 거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베이의 모든 PM이 그런 건 아니다.  팀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많이 달랐다.)

11111
눈이 동건이 형 반만 했어도 이렇게 한 번 째려보는 건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다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레벨이라는 사실과 최강 동안이라는 사실이 겹쳐져 굵직한 일을 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안 그래도 우울한 마음에 자격지심이라는 합병증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주변의 PM들은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와 쿵짝이 잘 맞아서 굵직한 프로덕트를 잘도 맡아 진행했는데, 나에겐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팀의 다른 PM들은 어떤 프로덕트를 출시하면 Techcrunch 등의 뉴스 미디어에도 나오고 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  나도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에게 저도 그런 프로덕트 하고 싶어요,하고 은연중에 마음을 내비치기도 하고 텔레파시도 쏘고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솜씨 있게 정치하고 자기 밥그릇 챙기는 데에 확실히 약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해서,라고 싸잡아 결론 내리기에는 한국에도 적극적이고 자기 PR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그냥 내가 적응을 못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얌전하고 무조건 열심히 하기만 하는 누렁이 소 같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동양인인 데다 영어도 잘 못하고 레벨까지 낮은 나에겐 치명적이었다.

치명적인 약점이 발목을 잡다

우선 나에게 오는 일들은 떨거지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목받는 프로덕트 launch (출시)는 남들이 다 하고, 일단 런치가 끝난 프로덕트는 나에게 떨어졌다.  런치 된 프로덕트는 MVP (Minimum Viable Product: 프로덕트가 돌아가기 위한 최소 기능만을 탑재한 아주 초기 상태)의 형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급조된 티가 많이 났다.  크고 작은 버그도 많고 확장성도 낮아 뜯어고쳐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소위 잘 나가는 PM들이 BU 님들과 손 붙잡고 쿵짝쿵짝해서 엄청 멋진 프로덕트를 런치 해 우선 온갖 조명을 다 받는다.  그리고 불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가면 자 나머지는 알아서 해, 하고 나에게 툭 던져지는 것이다. 그렇게 ‘두 손 위에 던져진’ MVP 프로덕트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시하자마자 없애야 하는 프로덕트도 있었다.  그렇게 이미 ‘소비된’ 프로덕트를 주로 맡아서 처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한마디로 프로덕트 청소부였다.

이베이 사원증이 쓰레기통에 빠진 것을 깨닫고, 청소 도와주시는 분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지던 모습.  사진은 지나가던 팀원 중에 하나가 낄낄거리며 찍었다.

그리고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 일을 하다 보니—물론 다른 이유도 많았겠지만—업무 능력 평가에서 항상 뒤처졌다.  첫 하반기 평가를 5점 만점에 2점을 받았고, 그다음 해 상반기 평가도 결국 ‘간신히’ 2점을 받았다.  왜 이렇게 낮은지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라고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항상 같았다.  너는 열심히 하고 다 좋은데 결정적인 프로덕트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니가 안 줬잖아,라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저에게도 그런 임팩트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부드럽게 말하면 응응 생각해볼게,라는 말로 대충 마무리됐다.  그리고 결과는 같았다.  화려하고 섹시한 프로덕트는 남들이 가져가고 무대에서 관중에게 보인다.  그 화려한 프로덕트들은 이내 커튼이 내려가고 ‘쇼’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카트에 대충 쑤셔 박힌 채로 나에게로 왔다.

일도 일이지만 5점에 2점은 솔직히 많이 실망스러웠다.  엉망인 프로덕트를 잘 닦고 다듬어서 꽤 쓸만하게 만들었으니 성과를 인정해주겠지,란 생각은 손만 잡고 잘게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보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2점은 아주 낮은 평가였다.  대부분의 직원은 3점을 받고 2점은 극히 소수의 직원이 받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2점을 여러 번 받으면 자기가 알아서 나가거나 특별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도태될 직원이 받는 점수였다.  1에서 5점의 분포가 Bell 곡선과 비슷하다고 하고 이베이 직원이 30,000명쯤 된다고 한다면 약 28,000등쯤 한 거다.

아이큐로 따지면 간신히 돌고래와 맞먹은 수준이다.  그런데 돌고래는 수영이라도 잘하지.
(Source Image – Average Married Dad)

한국에서는 아무리 사업을 말아먹었어도 그건 힘든 일이니까,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빼도 박도 못한 열성인자 낙인이었다.  이렇게 적나라한 낙인은 스탠퍼드에서의 담판 이후 오랜만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능력의 현주소인가 아니면 내가 큰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가 나를 미워하나 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유재석 씨와 박미선 누나를 더 애타게 찾았고 와인은 하루 720ml 한 병이 부족해 1.5 리터짜리를 사 먹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로부터 영주권 신청도 가장 오래 걸리는 EB-3(약 5 – 6년 걸린다)로 진행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MBA를 졸업하면 석사의 자격으로 EB-2(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린다)로 신청할 수 있었지만, 나 같은 경우는 레벨이 너무 낮아서 불가능하다는 통보였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런 뭐 같은 경우가.

아 몰라 때려치워

이 당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되뇌었던 말이다.  이렇게 되니 영주권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미국에서 돼지고기 사업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게 마음 편하지.  한국에서 하던 브랜드와 사업 모델 그대로 가져와 진행하면 본전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시장 조사도 하고 사업 계획도 준비하고 각종 이민 관련 컨퍼런스도 돌아다니며 사업가로서의 이민자 신분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도 공부했다.

물론 동시에 팀을 옮기려는 노력도 간헐적으로 했다.  나를 딱히 이뻐하지 않는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도 보기 싫었지만, 무엇보다 role이 마음에 안 들었다.  PM 따위 더러워서 때려치우고 나도 BU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누가 5점 만점에 2점으로 이미 헤매고 있고 매니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며 대학 졸업 2년 차인데 액면은 아저씨인 열성인자 PM을 데려가려고 하겠는가.

그때, 말 그대로 천사처럼 나타나 나를 구원해준 은인이 바로 새옹지마 #1에서 언급한 바 있던 실비아였다.  소피 마르소를 닮은 프랑스 출신의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 매니저.

…to be continued.

2 Comments Add yours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