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길

요즘 아침 저녁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바로, 충동 구매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비좁은 출근을 할 때도,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을 토해 내고 몸을 가볍게 한 텅빈 전철로 퇴근할 때도, 항상 이 책을 꺼내 읽는다.  오늘처럼 한 손엔 가방, 한 손엔 저녁을 떼우기 위한 버거킹을 들고 서 있을 때도, 어김 없이 집어 든다.  그럴 때면 가방을 손목에 끼고, 버거킹 봉지는 겨드랑이에 낀다.  난 한 손으로는 책을 못 보거든.  아무튼 그렇게 소정의 절차를 차근하게 밟고 마침내 가방에서 책을 꺼낼 때면 파란 겉표지의 책이 “헤이~!”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과장이지.  진짜는 아니란다.

(그러니까 조금 과장해서) “헤이~!”하고 모습을 드러낸 책을 펼쳐 들고 나면, 당신의 예상과는 달리—혹은 당신의 예상대로—일단 주위를 의식한다.  물론 시선은 책에 뒀지만, 또 다른 나의 시선으로 주위를 살핀다.  그리고는 누군가 내가 알던 여자가,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여자가 먼발치에서 나를 알아 보고는 살며시 다가와 “정서 아니니?  어머, 오랜만이다.  어머 하루키 책을 읽고 있었네!”하고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면, “응”하고 대답하는 일을 상상한다.

Image Source – 히토미의 옷장

실제로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아마 그 여자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겠지,라고 자위한다.

그러다 보면 한 정거장은 훌쩍 지나가지.

책을 펼치는 과정만으로 이 정도까지 즐거울 수 있다면, 그냥 내가 미친거거나 아니면 실제로 정말 재미있는 일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재미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 그를 통한 정서적 감흥이 일궈낸 재미이고, 그런 건 이미 죽은 감흥이다.  죽은 감흥.  그것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느끼는 순간은 매우 초라해진다.

책을 실제로 읽어 내려가는 단계부터는 아직 이야기를 안 했던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는, 작가가 일본 고베 대지진을 목격한 직후 고베 지진을 통해 얻었던 감흥을 소설로 표현 해 놓은 단편집이다.  여러 개의 단편 모두 묘하게 고베 지진과 얽혀 있다.  몇 개의 단편만을 남겨둔 채 거의 다 읽었는데, 고베 지진의 잔혹성이라던지 문학적 승화라던지 등등 개소리는 전혀 느낄 수 없다.  단지 하나 알 수 있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젠 소재도, 줄거리도, 신선한 문체도, 그리고 젊음을 상징하는 주제도 모두 다 고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 번 피식하고 웃어 주고, 책장을 넘기고, 다음 페이지의 최상단에 눈길을 던져준다.  이 때 여자가 다시 말을 건다.

“어머 나도 이 책 읽었는데…  근데 이젠 하루키의 문학은 죽었다는 생각을 했어.  죽은 감흥인걸.”

“글쎄.”

이런 대화가 오간다,

…는 상상에 다시금 빠진다.

그러다 보면 두 정거장은 훌쩍 지나가 있다.  그리고 이젠 내릴 때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이건, 확실히 요즘 새로 생긴 나의 즐거움이다.

* * * * *

예전 프리챌 시절 한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정확히 언제 쓴 글인지는 잘 모르게지만, 버거킹으로 저녁을 때우고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충동 구매했다고 하는 것을 보니 2000년대 초인 것 같다.  무려 약 18년 전!

그리고 각주를 달고 있는 지금은 2018년 11월이다.  그렇다.  무려 8개월 전에 만들어 놓은 예약 포스팅이다.

11월에 뭔가를 써보기 위해 끄적이다가 1월이 지나면서 포기하게 되는 패턴을 약 7년 째 반복 중이다.  8개월 후 예약 포스팅은 그래서 어쩌면 나에게 알람시계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또 일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소리쳐주는 거다.  깨어나라고!

그렇게 소리치는 글로는, 약 이십대 중반의 내가 써 놓은 이 글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프고 느끼하지만 설레이는 구석이 있다.  사십대 초반의 내가 어떤 기분일지 아랑곳 않고 마음껏 소리쳐줄 수 있을 것 같다.

죽은 감흥이라고 건방지게 폄하했던 하루키 사마는 그 이후에도 여러편의 멋진 책들을 계속 펴 내고 계시고, 이제는 노벨문학상—사회적 메세지가 약해서 어렵다는 평이 있지만—후보의 후보로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책은 안 읽고 제 3의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던 왕자병끼 가득한 이십대 중반의 청년은 두 딸을 둔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그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기어코 내 눈 앞에 어떤식으로든 나타나 실소를 자아내게 했던 이 놈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뒤통수 한 대치며 소리쳐주는 거다.  괜찮아 다시 해 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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